버스킹 하는 목사 이음교회 정찬석
수원 영통에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하나님과 사람을 이어주고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이음교회’가 있다. 침례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정찬석 목사가 시무한다. 2018년 6월 19일에 이전 예배를 드렸다. 2017년 11월 5일에 가족끼리 첫 예배를 드릴 때에는 수원 경희대 맞은편에 있는 굿피플카페(Good People Cafe)를 빌려서 예배를 드렸다. 1년이 채 못 되어 이전을 한 건데 정찬석 목사의 사역을 응원하던 아는 집사님이 상가를 인수한 후 2년간 무상으로 빌려줄 테니 교회를 하라고 해서 거저 들어왔다. 아무 것도 없는 빈 공간을 컨셉 있는 교회로 꾸밀 비용이 없었다. 그런데 이 돈도 정 목사의 사역을 보고 어떤 분이 인테리어 비용으로 쓸 만한 돈을 기탁해 왔다. 공사를 하다 보니 예상보다 돈이 더 들었는데 이것도 그때마다 누군가 비용을 보내왔다. 피아노도 기탁 받고 여러 경로로 들어오는 도움이 더해져 공간은 북 카페 스타일로 꾸며졌다. 1600여권 장서도 누군가 보내줘서 수원시에 작은 도서관으로 등록을 했다. 동네 아이들이 드나들며 단을 올려 온돌을 놓은 바닥에 배를 깔고 책을 읽으며 놀다가 간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정찬석 목사의 사역은 무얼까? 정찬석 목사는 버스킹을 한다. 목사니까 당연히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들이다. 그런데 그 사역하는 시간과 장소가 놀랍다. 아침 출근길 지하철 역, 아이들의 등굣길, 매연가스 자욱한 큰 길 사거리... 아침 일찍 오산 집에서 수원으로 이동하여, 출근하는 사람들에게, 등교하는 아이들에게, 찬양으로 원기를 북돋으며 격려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전한다. 아침 인사와 축복의 메시지는 기본이다. 누구나 다 그런 일을 좋아하는 건 아니다. 교인 중에도 아침부터 뭐하는 거냐 핀잔을 주는 사람도 있다. 같은 목사이면서도 효율성을 따져 괜한 시간 낭비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오랜 부교역자 생활을 접고 목사 안수를 받을 준비를 하면서 기도 중에 ‘내가 세상 가운데 나가서 외쳐 보지 않은 것을 강단에서 말할 수 없다’는 고민을 하게 됐다. 목사가 되려면 세상 가운데 나가서 ‘하나님이 왕이시다’라고 선포할 수 있어야 교인들 앞에서 하나님이 왕이시라고 말씀을 가르칠 수 있지 않겠나 생각했다. 그래서 목사가 되면 세상에 나가 하나님이 왕이시라고 선포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2017년 7월 11일 목사 안수를 받고 바로 다음 날부터 거리에 나가 찬양을 했다. 찬양의 목적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고백이고 하나님이 세상의 왕이시라는 선포다. 경희대 캠퍼스에서 찬양을 하다가 허리를 다쳐서 병원에 입원했던 일주일을 제외하고 쉬어 본 적이 없다. 매일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간대에 찬양을 하니 그 시간에 출근하는 사람들을 항상 만난다. 처음엔 관심 없던 사람들도 눈에 익어지면 마주 인사를 하고 어느 새 다가와 음료수를 주고 가기도 한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게 쫓겨난 일도 있지만 대개는 호의적이다. 요즘엔 학생들 등굣길 길목 공원에서 찬양을 한다. 처음엔 학교 교감 선생님이 나와 호통도 쳤지만 이젠 학교에 새로 오신 선생님을 데리고 나와 인사를 시켜줄 정도로 친근해졌다. 공원 관리인 아저씨와도 친해지고.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아이들을 만나니 아이들의 변화도 쉽게 알 수 있다. 누구는 신발을 새로 샀고, 누구는 귀걸이를 했고, 누구는 친구와 다퉜고, 누구는 아파서 학교에 못 왔고... 아무 관계없는 아이들이 마음으로 하나 가득 들어와 있다. 친해진 아이들은 하이 파이브도 하고 가고 라이브로 방송되는 핸드폰 카메라에 대고 노래도 한 곡조 뽑고 간다. 이렇게 사람들과의 만남이 좋아지는 것뿐 아니라 정 목사 자신도 느끼고 배우는 것이 많다. 요즘 아이들이 얼마만한 무게의 짐을 지고 살아가는지, 그 애들의 메고 가는 책가방에 어느 새 얹어진 삶의 무게를 느끼고 맘이 아파오기도 하고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된다. 하루는 ‘이 아이들에게 뭐라도 좀 주고 싶다. 간식이라도 좀 사주었으면 좋겠다’ 생각하며 찬양을 하고 있었는데 문자가 와서 열어보니 누군가 ‘애들 간식이라도 좀 사주세요’ 하며 돈을 보내주었다. 간식을 주고 싶다고 생각한 바로 그 순간 간식비가 들어온 것이다. 놀랍고 신기해서 그 이야기를 페이스 북에 나누었더니 그 후로 여러 곳에서 등굣길 아이들에게 나눠주라며 간식과 후원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후로는 매주 금요일마다 교회에서 포장한 간식을 들고 나가 나눠주고 있다.
이 찬양의 고백과 선포를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시는 것 같다. 어느 날 동탄고등학교 앞에서 버스킹을 끝내고 ‘오늘은 너무 힘이 드네요. 하나님. 많이 지치네요...’ 마음으로 얘기하며 기타를 정리하고 돌아서는데 3층짜리 학교 건물 각 층마다 아이들이 창문에 매달려 손을 흔들며 “아저씨 오늘도 즐거운 하루 되세요~ 사랑해요!” 잘 가라 인사하며 환호하는 것 아닌가. “어, 그래! 아저씨 힘낼게~!” 울컥 눈물이 솟으며 소름이 끼치는 감동이 왔다. 마치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기뻐한다’고 ‘힘내라’고 위로와 격려를 보내시는 것 같았다. 이런 하나님이신데 어떻게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거리에서 홀로 외로이 찬양하지만 하나님이 왕이시라는 고백과 선포를 쉬지 않고 계속 해온 이 일이 평생 해온 일 중 가장 잘 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역의 열매가 없어도, 허공중에 흩어지는 노래라 할지라도, 정 목사는 평생 이 일을 하다가 갈 것 같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처음 찬양을 시작한 날, 공원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은혜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네’ 찬양을 시작했다. 벤치에 앉아있던 60대쯤 되어 보이는 여자 분이 찬양을 계속 따라 부르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좀 있다 대성통곡을 한다. 찬양을 마치고 나니 다가와서 자기가 요즘 너무 힘이 들었는데 오늘 하나님께서 위로하시는 것 같다면서 더운데 수고하신다고 인사를 건네왔다. 더해서 자기 몸이 많이 안 좋으니 기도를 좀 해달라고 부탁을 해 그 자리에서 기도를 해주고 헤어졌다. 첫날부터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날 저녁 수원역 로데오 거리에서 찬양을 하던 날의 일도 잊혀지지 않는다. 번화한 거리에서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찬양을 한 시간 동안 소리 높여 외치고 허탈하게 돌아설 때, 옆에서 전단지를 돌리던 손이 굽고 몸이 불편한 어떤 사람이, 한눈에 보아도 장애인이 분명했는데, 날도 추운데 불편한 몸으로 고생하는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었다. 찬양을 끝내고 짐을 정리한 후 자리를 떠나려고 하자 그 사람이 다가와서 인사를 했다. 잠실에서부터 전단지 나눠주는 일을 하러 수원까지 온 사람이었다. 자기도 교회를 다니는데 오늘 계속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해줘서 힘을 낼 수 있었다고 고맙다고 하면서 드릴 것이 없어 이거라도 드린다며 주머니에서 초코바 하나를 내주었다. 어려서부터 가난하게 살아왔던 정 목사는 없는 사람에게 그 초코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안다. 그것은 그 사람의 한 끼 식사다. 그것은 그 순간의 자기의 생명인 것이다. 그분을 부둥켜안을 수밖에 없는 감동이 밀려왔다. 그 분은 멀리서 같은 일하던 동료를 불러 “여기 이 목사님이 내가 일하는 동안 계속 노래를 불러 주어 정말 힘이 됐다”며 또 자랑을 했다. 정말 너무너무 좋았던 모양이다. 돌아오는 길에 하나님께서 “아무도 안 듣고 있는 것 같아도 누군가는 듣고 있단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저절로 느껴졌다.
아무도 안 믿지만 정 목사는 가난하게 자랐다. 부산 출신으로 국제시장에서 양말 장사하는 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공부했다. 어머니 덕에 교회는 열심히 다녔고 크면 당연히 목사가 되는 건 줄 알았다. 목소리가 좋고 따로 공부하지 않아도 발성이 돼서 두어 달 준비하고 부산 경성대 교회음악과에 성악 전공으로 합격을 했다. 모두 너 정도면 서울로 가도 될 것 같다고 권해서 한 학기를 마치고 다시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서울로 왔다. 그러나 결과는 모두 낙방. 이 길이 아닌 모양이란 생각이 들어 진로를 수정해서 침례교신학대 교회음악과 성악 전공으로 진학을 했다. 어차피 목사가 될 거니까 신학은 대학원에서 하고 학부 때는 전문 사역 쪽으로 필요한 다른 것을 배우고 싶었다.
28세부터 사역을 시작했다. 13년가량 미취학 아동부터 시니어에 이르기까지, 노숙인과 시각 장애인 특별 사역까지 다양한 목회 사역을 경험해 왔다. 그러나 부교역자의 사례로는 생활이 어려웠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여러 가지 기능적인 일들을 배웠다. 어렵사리 중고 사진기를 구해 사진작가로 활동도 하고 디자인 회사 영업사원으로 들어갔다가 포토샾과 일러스트를 배워 디자이너도 되었고 웹코딩, 영상과 드론 촬영까지 수준급으로 할 줄 안다. 바리스타 자격증도 땄다. 물류창고에서 일할 때 보수를 더 받기 위해 지게차 운전 자격증도 땄고 전기 시켄스 기능 자격증도 있다. 그러나 이런 기능들을 사용하여 밥벌이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목회에 필요한 기능으로는 사용을 하지만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하지는 않는다. 목회에 방해가 되지는 않는 수준에서 가끔 아르바이트는 한다. 사실 목사 안수를 받으며 광야로 나왔다고 생각한다. 어린이집 교사를 하며 백만 원 월급을 받는 아내의 동의를 얻어서 먹고 사는 일마저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기로 했다.
버스킹을 끝내면 교회로 와서 말씀 묵상도 하고 설교 준비도 하고 목사로서 해야 할 일들을 한다. 주변에 교회를 알리기 위한 행사 준비도 하고. 얼마 전 10월 마지막 주 토요일엔 피아니스트 김기경 형제의 연주회가 있었다. 정 목사의 사역을 돕고 싶다고 김기경 형제에게서 연락이 왔다. 전단지 4천 장을 만들어 돌리고 정성을 다해 행사를 준비했다. 생각만큼 많은 사람들이 오지는 않았다. 단 두 가정의 이웃과 교인들이 모였을 뿐이다. 그러나 연주회가 끝나고 ‘우리는 이 행사를 하나님 앞에 드리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최선을 다해 준비했다. 그리고 우리 모두 행복했다. 그거면 충분하지 않은가’ 하며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11월 17일부터 매주 토요일에 10주간 진행되는 ‘가베학교’도 준비 중이다. 역시 4천 장의 전단지를 만들어 돌렸다. 만3세부터 만5세까지의 유아들을 대상으로 하는 만큼 신경 쓸 일이 많다. 전문 유아교육 교사들이 와서 도울 예정이다. 토요일엔 이음카페에 와서 책을 읽다가 사귄 아이들과 야구도 한다. 목사 포함 세 사람이다. 야구를 마치고 나면 교회 앞에 파라솔을 펴고 붕어빵을 구워 나눠준다. ‘생명의 붕어빵’이다. ‘복음을 즐거워하는’ 이음교회 교인들이 기꺼이 나와서 돕는다.
주일에 예배를 마치고 나면 예쁘게 나눠 포장한 뻥튀기를 들고 공원에 전도를 나간다. 즐거운 마음으로 모두가 함께 한다. 아직 열매는 없다. 그러나 ‘여기 교회가 있다’는 것을 알리고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일이 즐겁기만 하다. 아직은 모든 게 그렇다. 교인들도 채 열 명이 되지 않는다. 그래도 기쁘고 즐겁다. 감사하다. 하나님 앞에 올려드리는 이 모든 시간들, 모든 순간의 마음과 정성과 뜻이 하나님을 향해 있으니 11시 예배를 목사 혼자 드려도 기쁨이 충만하다. 하나님께서 받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행복한 그 시간을 위해 이제 목요일 저녁엔 찬양예배도 드리기로 했다. 누가 올지, 이런 일들로 전도가 될지, 목회 사역을 펼치면서 일의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생각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께 드린다’는 마음으로 지역을 섬긴다. 상가에 고장난 것들도 고쳐주고, 피아노 학원 발표회 순서지도 만들어 주고, 청소년수련회를 열면 동네 청소도 한다. 모든 게 다 시작인 것 같아도 그 시작하는 것이 곧 열매라고 생각하고 감사한다. 정찬석 목사는 ‘나같은 사람을 찬양으로 하나님을 선포하게 세우시고 교회를 개척하게 하시고 복음을 전하게 하시다니 매일이 기적이요 감사’라고 고백한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이 시대에 2년 후에는 이 교회가 어떻게 될지, 어디로 갈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