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여러분은 무엇을 소망하는 자입니까?
본문 : 고린도후서 1:7~11
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10 그가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또 건지실 것이며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11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고린도후서 1:7~11 까지 말씀으로 “여러분은 무엇을 소망하는 자입니까?”라는 제목으로 함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주님을 의지합니다.
저는 어릴 적에 아주 꿈이 많았습니다. 죄송하지만 잠까 제 이야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저는 모태신앙이었고, 어른이 되면 그냥 목사가 되는 줄 알았습니다. 중학교 때 꿈은, 만화가 였습니다. 그리고 성악을 전공하면서 성악가가 꿈이 였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에 형사, 변호사, 자전거 고치는 사람, 차동차 고치는 사람, 시인, 수필가, 포장마차에서 오뎅파는 사람, 연극인, 뮤직컬 배우, 연기자, 기타등등 여러 가지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았습니다. 물론 철이 없을 때 일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찬석 목사 하면 말씀이 좋다. 성품이 참 괜찮다. 그래 다른 사람을 몰라도 정찬석 목사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야 라는 말은 커녕 그런 말은 한 번 도 들어 본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알고 또 어느 정도는 인정하는 분위기가 있고, 또 여러 사람들이 저를 두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다 아시죠? “정찬석 목사는 재주가 많다. 그래서 뭐다? 그래서 안된다. 그래서 배고프다.”입니다. 종종 여러분들도 그런 평가를 저를 향해 말씀하시는 것을 저는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어릴 적부터 재주가 많으면 배고프다라는 말을 어르신들에게 흔하게, 수도 없이 들어왔던 말입니다. 그래서 때론 화가나서 “아니 내가 재주를 가지고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나? 그래서 나보고 어째라고요? 재주가 없어지라고 팔이라도 자를 까요?”라고 반문 한 적도 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하고 싶은게 많고 뭘 해도 곧 잘하니까? 그런 말을 듣는게 아닌가 봅니다.
제 인생을 전반기 후반기로 나눠보면 목사 안수 전과 후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이됩니다. 저는 목사안수 준비를 통해서 큰 은혜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전에는, 제가 손에 쥐고 있었던 그것을 통해서 앞으로 다음 사역을 이어 나가려고 했던 저의 계획이 완전히 변경이 되었습니다. 저는 기독교 멀티미디어 사역쪽으로 관심을 가지고 무언가 성과를 낼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통해서 제가 원하는 수준에 도달해서 멀티미디어 사역에 후배들을 가르치는 일들까지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 꿈들이 없어 졌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제 속마음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 나의 노력, 시간을 드려서 만들어낸 기술, 손재주를 더 의지를 많이 했습니다. 물론 이 모든 재능들도 저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고 확신합니다. 하지만 그 속에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가능성을, 저의 재능들을 더 의지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목사안수 논문을 준비하면서 큰 은혜를 다시 깨닫게 되었고 여러분도 알다시피 광야에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그간 함께 해 오신 여러분은 저의 모든 과정을 알고 계시기도 할 것입니다.
광야에서의 삶이 시작되었고 지금 까지 오면서 저는 수많은 하나님의 질문에 답을해야만 했습니다. 그 대답을 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어려움들이 있었고 외로움과 고독함이 있었습니다. 왜냐면 저는 제 인생을 살아오면서 단 한번도 광야에서의 삶을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광야의 삶이 시작되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보장되어 있지 않은 가운데 교회개척을 하게 되었고 또 수많은 반대와 말들과 안 될 것에 대한 이야기와 긍정적이 이야기보다 부정적이 이야기를 더더더 많이 듣게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제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전도를 하기위해서 거리에 나아간 것이 아닌 것 너무도 잘 아시죠? 하나님을 찬양하고 신앙을 고백하기 위해 거리 가운데 세상가운데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찬양하는 삶을 통해서 세상의 일들을 보게 하셨고 여중생폭행사건과 장애인학교설립반대 문제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겠다는 마음과 전도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10개월 동안 달려오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끄럽지만 저에게 소망이라는 것이 바라는 것에 멈춰 있었던 사람입니다. 소망이라는 것이 바라는 것에 멈춰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광야가운데 서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복음을 전하고 전도하는 일들을 작게나마 시작하다보니 내 소망이 그저 바라는 것에서 멈춰있던 것이 하나님을 소망하는 것으로 바꿔지는 일들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매일 매일이 눈에 보여지지 않습니다. 세상사람들이 말하는 잘 되꺼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하나님을 소망하는 마음이 내 속에 가득해진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은 부활 주일날 보았던 말씀의 마지막 구절로 시작합니다.
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바울이 자신을 배척하고 의심했던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그들을 향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여기서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에서 소망이 견고한 것이 무엇입니까? 바울이 믿었던 것은 고린도교회에, 그 사람들의 가능성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믿고 소망했던 것은 바로 우리를 사랑하셔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소망” 세상에는 수많은 소망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사용된 단어 헬라어 ejlpiv"(1680, 엘피스) 란 단어는 소망 hope, 기대 expectation. 현제의 삶을 초월한, 죽음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초월적이 소망과 기대를 표현할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바울은 이미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깊이 경험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부름받았다고 자신을 늘 소개합니다.
그가 이방에게 복음을 전하고 공동체를 세우고 지체를 돌볼 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8절 9절입니다. 우리가 이 구절은 여러 번 걸쳐서 계속 설명했던 부분입니다. 에베소에서 좀 더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기 원했지만 그를 피박하고 박해하는 사람들에게 고난을 당하고 마게도냐로 일찍 가게되었습니다. 그러거 거기서 당한 고난과 고통으로 인해서 이런한 심정을 담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바울 속에서 다메섹에서 만났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셨습니다. 그로 인해서 그 속에 하나님을 소망하는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그가 어떤 일을 당하여도 말입니까?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사랑하는 여러분 이쯤 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냥 다 때려치우고 돌아가야 하는 게 정상 아닙니까? 이정도 되면 하나님은 안계신다. 그만 나는 할 만큼 했다. 다시 돌아가자 그런 말이 나와야 정상입니다. 그렇게 해도 이해 받을 만합니다. 아니 하나님도 양심이 있지 이정도 했으면 이 정도는 해줘야 되지않습니까?
그런데 사도 바울은 말도 안되는 고백을 합니다.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복음을 즐거워하는 이음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의 핵심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으로 힘들어 하십니까? 여러분은 무엇으로 고난당하십니까? 자녀에 문제, 경제적인 문제, 사람의 문제, 학업에 문제, 앞날을 알 수 없는 삶의 문제, 내 인생을 더 이상 보장할 것이 없는 절망감, 질병
여러분 이 모든 것을 이기는 것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미 그것으로 삶이 충만하였습니다.
그가 사형 선고를 받았다고 생각 할 정도로 매질을 당하고 고난과 고통가운데 있었지만 그가 여전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이 땅의 부르심의 사명을 잘 감당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안에, 바울 속에, 하나님을 소망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견고함은, 9절 이하입니다.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여러분의 상황과 삶을 모두 세세하게 다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저는 여러분이 하나님을 소망하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삶의 어떤 고난의 위치에 있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저와 여러분들 위해서 이 땅에 보내시고 보내셨을 뿐만아니라 다시 살리신,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신 그 하나님만 의지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무엇이 중합니까? 죽으면 다 내려놓고 갑니다. 죽으면 하나도 빠짐없이 이 땅에 다 내려놓고 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주님을 만났지만 여전히 이 땅의 문제와 삶의 문제로 힘겨워하고 두려워하고 또 그 문제로 인해서 우리가 이미 소망했던 하나님을 우리가 이미 의지 했던 하나님을 놓치고 계시다면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오늘 사도 바울 속에 있던 그 하나님의 소망으로 충만함이 여러분 속에도 충만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는 연약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과 능력으로만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 뿐이네 가사가에 어떤 고백이 있습니까? “은혜 아니면 살아 갈 수 가 없네 호흡마져도 다 주의 것이니”고백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 고백은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힘과 능력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살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10~11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10 그가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또 건지실 것이며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그가!! 여기서 그가 누구입니까? 하나님께서 이같이 큰 사망(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죄에서, 사망에서 건지셨습니다. 그리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저는 이 말씀에 두가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그리고 우리가 삶을 살아가다 보면 우리의 연약함으로 믿음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우리의, 그 연약함에서 우리를 건지십니다. 또 이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란다. 다른 성경에 보면 그에게 의지하여 바란다.라고 나와 있는 성경이 있습니다. 저는 이부분을 이렇게 해석하고 싶습니다.
하나님 말고는 우리를 이 믿음 없음에서 이 연약한 가운데서 건지실 분은 하나님만 가능하시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11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간구함으로 돕는 것이고 간구함으로 돕는 다는 것은 기도한다는 것인데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봐야할 단어는 간구함으로라는 단어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떨 때 간구함이 나옵니까? 공동체에서 어떨 때 간구함이 나와서 그 지체를 두고 기도할 수 있습니까? 저는 공동체의 간구함은 친밀함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교제하고 마음을 주고받을 때 서로에 대한 진실 된 간구함이 나오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지 않을 때도 우리가 간구해야 할 때도 있지만 서로가 나눔을 통해서 교제 했을 때 그 사람의 사정을 알고 더 간구함으로 기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이음공동체를 통해서 서로서로를 중보하고 간구함으로 공동체가 견고해 지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의 능력을 믿으십니까? 혹 고난당하는 지체들이 있다면 그들이 그 믿음 잃어버린 것에서 다시금 믿음을 회복 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그렇다면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 간구함과 기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우리 공동체에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는 일들이 넘쳐나기를 소망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무엇을 소망하는 자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바울 속에 있는 하나님을 소망하는 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어떤 마음이십니까? 오늘 본문을 읽으시면서 여러분에게 어떤 질문이 찾아왔습니다. 나는 과연 무엇을 소망하는 자인가? 내 속에 바울이 소망했던 그 하나님이 내 속에도 소망함으로 계신가? 아니면 나는 무엇을 소망하는 자인가? 내 안에 소망이 있지만 바울 속에 있던 그 소망함처럼 견고 한가? 현제의 삶을 초월한, 죽음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초월적이 소망과 기대 내안에 있는가?
사도바울의 고백은 이렇습니다. 그가 이제는 죽는 줄로만 알았는데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라고 고백했던 고백이 삶의 지쳐있는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삶의 깊은 수렁에 빠진 여러분이 계시다면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는 고백이 저와 여러분에 고백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의 해답이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 인생의 수많은 난제의 해답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 하십시오. 주님을 소망하십시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도 바울과 같은 살 소망이 끊어지는 상황 가운데도 하나님을 소망하게 될 것입니다. 소망한 뿐만 아니라 그 소망함이 너무도 견고해서 죽는 줄로만 알았는데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는 고백을 우리의 속에 넘쳐나게 하실 것입니다.
축도
전능하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심과 독생자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하심이 보잘 것 없는 우리 부족한 인생 가운데 찾아오셔서 나보다 앞서 먼저 나를 사랑하시고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내버려 두시지 않으시고 우리를 붙잡아 주시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 죽으시고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신 그 기쁨이 우리에게 충만 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말씀을 듣고 돌아가는 이음교회 성도님들과 함께한 모든 자 머리머리위에 하나님만이 소망이되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은혜들이 지금으로부터 영원히 충만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
1. 나는 무엇을 소망하며 무엇을 의지하는가?
2. 연약한 지체를 위해 간구하며 기도 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