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여러분의 위로와 기쁨은 무엇입니까?
본문 : 고린도후서 7:2~4
2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우리는 아무에게도 불의를 행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서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
3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를 정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전에 말하였거니와 너희가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
4 나는 너희를 향하여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
12월 어느 날부터 우리는 의도 하지 않았지만 계속해서 고린도후서를 통해서 바울의 이야기를 통해서 성경을 묵상하고 그 안에서 말하고 있는 진리들을 알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가 계속해서 말씀을 묵상하고 함께 나누지만 모든 성경의 말씀들이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에게 열려지지 않는 다는 사실과 주님의 말씀으로만 우리가 살수 있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오늘도 이 말씀을 상고하고, 묵상하고 어떻게든 진리를 깨달게 되어, 그 진리가 우리를 인도하는 되로 삶을 살아보고자 말씀을 함께 나눕니다. 우리 주님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가 지난주에는 6:1~10 까지 말씀을 보고 11절에서 7:1절 까지 말씀을 건너뛰고 오늘 말씀을 보게 됩니다.
6:11~7:1절 까지 문맥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 바울이 왜 이런 이야기를 했는지에 관해서 설명을 드리자면 계속해서 사도바울은 사역을 하면서 부르심에 대한 사도직에 대한 그들을 설득하고 설명하는 일들을 같이 해야만 했습니다. 우리가 바울을 부를 때 그냥 바울이라고 하지 않고 꼭 앞에 사도라는 직분을 붙여서 사도바울이라고 부릅니다. 사도라는 단어의 헬라어는 ‘아포스톨로스’ 보냄을 받은 자란 뜻으로 주님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 세상으로 파송을 받은 자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특별히 이 단어는 예수님의 12제자, 예수님의 공생애와 죽으심과 부활을 사건을 목격한 사람이어야 그렇게 불려졌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공생애와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목격하지는 못했지만 사도행전 22장을 보시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또 이방인을 위해 보냄을 받은 자란 뜻으로 사도바울이라고 계속해서 설명하는 장면들을 우리는 바울 서신들을 통해서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다 찾아 볼 수 없지만 사도행전을 보시면 바울은 자신의 신분의 대해서 구구절절 설명하는 부분이 참 많이 나옵니다. 어떤 족보를 가지고 있으면 어떤 스펙 가지고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런 이야기 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 라고 딱 잘라서 복음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로 종으로 사도로 부름 받았다고 확신하며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그런데 사도바울은 계속해서 사역을 하면서 사람들이 문제를 제기하고 의심하는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사역을 하면서 이방에게 복음을 전하고 공동체를 세워나가는 일 가운데, 그 사역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과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 것을 설득하고 설명하는 일들을 끊임없이 해야만 하였습니다. 어떤 환경에서요? 사도바울은 끊임없이 죽을 고비를 넘기며 공동체를 세우는 일과 복음을 전하는 일을 쉬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그 무리에서 비난을 당하고 누명을 써도 말입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가 선택한 일은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는 것이고 14절 이하입니다. 불법을 행하는 것이고 심지어 벨리알(무가치하고, 사악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사탄의 이름을 숭배합니다.
그러한 자들이 계속해서 사도바울을 의심하고 대적하려는 그러한 배경을 이 본문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 배경을 가지고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2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우리는 아무에게도 불의를 행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서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
3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를 정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전에 말하였거니와 너희가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
4 나는 너희를 향하여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
사도바울은 끊임없이 고린도교회에 자신을 변론합니다.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우리가 하는 이 일은 아무에게도 불의(잘못행하지 않는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해롭게(파괴하거나, 부패시키거나, 못쓰게 만들지 않는다.) 그리고 아무에게서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 갈라디아서 2:10, 고린도전서16:1~4, 그리고 로마서 15:25~26 절을 보시면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모금을 한 기록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례들을 가지고 고린도교회에 모범을 제시 하였는데 고린도교회 사람들은 바울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무슨 의심이요?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그 후원이 바울을 해하려는 비방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주머니를 채우려고 기부와 모금을 한다 이렇게 근거 없는 소문이 돌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끊임없이 설득하는 장면입니다. 6:11~13절도 보시면 뭔가 앞뒤 문맥이 뚝 잘린 느낌을 받으실 수 있는데 계속해서 바울은 자신을 믿지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싸움을 걸고 이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믿음으로 그들을 설득하고 설명하여고 애쓰고 있는 바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2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우리는 아무에게도 불의를 행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서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
3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를 정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전에 말하였거니와 너희가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
4 나는 너희를 향하여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요 이게 말이 됩니까? 아니 바울이 어느 정도의 사람이었기에 이 일이 가능했나요? 복음을 전하기에 노력하고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노력하는 바울을 도와주지 못할망정 바울을 비난하고 의심하고 공동체의 물을 흐리고.. 여러분 보통 사람이라면 이정도 했으면 포기 하고 돌아 서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리고 돌아서도 아무문제 없습니다. 이정도 했으면 사람들이 뭐라고 할까요? “그래 할만큼 했어 잘했어”
그런데 바울은 어떻게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 할 수 있을까요?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를 정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전에 말하였거니와 너희가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 저는 오늘 이 말씀이 왜 이렇게 무겁게 느껴지는 걸까요? 하나님 저 정찬석 하나님 사랑하는 거 아시죠? 주님 저 부족하지만 하나님 사랑하시는 거 아시죠?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니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지 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과연 복음을 전하다 누명을 쓰고 비난을 받으면 나는 어떻게 할까? 사람들이 저에게 이렇게 말하겠죠? ‘정목사 자네 할 만큼 했어!! 많은 사람들이 자넬 인정 할 꺼야!! 열심히 했잖아’
너희가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주님 사랑하십니까? 주님 어디까지 사랑하십니까? 복음 여러분에게 중요한 것입니까? 공동체를 세워 나가는 것 여러분에게 중요하십니까? 지체를 일으키는 일? 여러분에게 중요하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이 정말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을까요? 아니면 공동체를 세우는 일이었을까요? 아니면 지체를 일으키는 일 이었을까요?
일자 무식쟁이인 제가 감히 말씀드린다면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 먼저가 아니었습니다. 공동체를 먼저 세우는 일이 먼저가 아니었습니다. 지체를 일으키는 일이 먼저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일, 주님께 받은 은혜를 상고하고 묵상하는 일, 주님의 은혜가 과연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나는 어떤 은혜를 주님께 받았나 하는 일을 통해서 먼저 주님을 사랑하는 일이 아니었나? 그렇게 생각되어 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믿음으로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부르심이다? 뻥치지 마십시오. 주님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
주님 저는 복음 전하는 일 공동체 세우는 일 못하겠습니다. 여러분 이음교회 나오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러분 신앙생활 제대로 하려고 애쓰고 노력하는 일 무엇 때문입니까? 주님 사랑하기에 어떻게든 믿음 안에 붙어 있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습니다. 호산나 호산나 가는 곳 마다 열광합니다. 하지만 끝내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하고 침 뱉고 모욕하고 결국에는 십자가에 매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그 고통을 아셨을까요? 모르셨을까요? 그런데 그 고통을 참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고통을 참아 내셨다는 것입니다. 이번 주가 지나면 다음 주 부터 고난 주간이 시작됩니다. 저는 이 번 고난 주간을 통해서 저는 여러분이 예수님을 향한 그 사랑이 충만한 한 주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그 고린도 교회를 향해 자신을 비난하는 이들을 향해 포기하지 않고 그들에게 설명하고 설득했던 이유, 그리고 너희가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 무엇으로요? 예수 그리스도로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
4절입니다.
4 나는 너희를 향하여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
나는 너희를 향하여 담대한 것도 많고 여기서 ‘담대한 것’이라는 단어의 원어적인 뜻은 ‘신뢰, 확신’이라는 의미로 해석하면 훨씬 그 뜻이 정확할 것입니다. 나는 너희를 향하여 신뢰, 확신이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먼저 여기 까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감이 오시나요? 나는 너희를 향하여 신뢰, 확신이 많다. 그리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다. 바울이 무엇이 부족해서 자신을 비난하는 자들에게 나는 너희를 향하여 신뢰 확신이 많다. 그리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다고 이야기 했을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이 말씀이 사도바울에게 주님께서 부어주신 소망하는 마음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소망하지 않았다면 그는 결코 자신을 비난했던 무리들을 보고 나는 너희를 향하여 신뢰 확신이 많고 우리 인간적은 눈으로 보았으면 소망 할 것이 하나 없는 그저 자신을 비난 하는 무리들이지만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는 마음이 이렇게 표현되어지지 않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제 이야기를 해서 죄송한데 제가 9개월 동안 거리에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그렇게 지내 왔습니다. 너무 부족하기에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현장에 있으면서 한 가지 깨닫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길 소망하는 마음으로 외친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들을 사랑할 이유가 있을까요? 사랑해야 해서요? 여러분 사랑해야 해서 사랑하면 그 사랑 잘되나요? 저는 안됩니다. 근데 내가 하나님 사랑하니까! 나가서 목이 터져라 고함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결과는요? 지난 9개월 동안 무슨일이 있었습니까? 인간적인 결과들은 없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엄청난 수많은 변화들이 있고 이로 인해서 깨달게 되고 은혜를 경험하게 된 일들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현장은 늘 냉정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신고까지 합니다. 그리고 와서 성난 얼굴로 따지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나는 너희를 향하여 신뢰, 확신이 많다. 그리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소망함 때문에 그 속에 울림이 그 속에 가득 참이 그들을 향해서 그렇게 표현되지 않았을까요?
4절 후 반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4 나는 너희를 향하여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 도다. 제가 사도바울처럼 고린도후서 1:8~9에서 말하는 것처럼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이런 고난 제가 당해 보았습니까? 아니면 여기서 당해 보신 분 계십니까? 이뿐 아니라 이미 우리가 알고 있듯이 사도바울이 복음을 위해서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서 당한 고난은 이로 말 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면 이 사도바울의 고백은요 참으로 놀랐습니다.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 도다.’
제가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느껴지는 감정은 눈으로 보지는 못했지만 ‘사도바울이 정말로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했고 기쁨이 넘치는구나.’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주님 사랑하십니까? 주님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무엇으로 위로 받고 무엇으로 기쁨이 넘치는 자들입니까?
아무것도 아닌 제가 경희대 앞에서 찬양을 얼마 전에 시작하면서 제게 없던 마음이 생겼습니다. 이미 함께 나눠서 알고 계신 분도 계시겠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이 캠퍼스에 이 학교를 다니는 청년들 중에 나와 같이 아니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래서 주님 사랑해서 믿음을 표현하는 그런 청년이 한 사람 생겨났으면 좋겠다는 소망하는 마음입니다. 그리고는 다음 두 번째 청년이고 그리고 다음은 세 번째 청년이고 그리고 이 캠퍼스에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운동들이 일어났으면 하는 소망하는 마음입니다. 제가 여기 다니는 청년들 사랑할까요? 사랑하지 않습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 소망합니다. 네 너무도 부족하서 주님 은혜에 절대 도달할 수 없지만 그래도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 소망합니다.
그래서 위로를 받아도 주님의 위로가 참 위로라는 것은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세상에 수많은 기쁨이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으로 넘치는 그 기쁨은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여러분 여기 주님의 위로 이 부분 정리가 되십니까? 주님의 기쁨 정리가 되십니까? 무엇이 주님의 위로일까요? 복음으로 인해 고난 받으면 보상으로 받는 무슨 그런 위로 일까요? 그런게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죠?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속이 훨씬 편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주님의 위로는 무엇일까요?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그것은 하나님을 소망하는 마음일 것입니다. 왜 하나님을 소망하는 일이 위로 일까요? 주님이 우리에 전부이시기 때문에 위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위로를 받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주님의 것인데 다른 것으로 우리 속을 채우려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우리의 소망이, 계획이고, 의지이고 전분인데 우리가 우리 속에 하나님 아니 다른 것을 채우려 하기 때문에 위로가 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삶을 살아 가다 보면 우리 눈으로는 결코 변할지 않을 것 같아보이는 일들이 있습니다. 특히 자식문제, 돈 문제, 관계의 문제 제가 너무 쉽게 말합니까? 주님을 소망하십시오. 주님을 전부라고 입으로만 말하지 마시고 그 소망함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귀한 위로 저는 여러분이 맛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사랑하십시오. 그렇다면 그 소망을 따라 하나님께서 기쁨이 충만히 차고 넘치게 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주님 사랑하십니까? 무엇으로 위로를 구하고 있습니까? 무엇으로 기쁨을 구하고 있습니까?
오늘 말씀을 요약하자면 사도바울은 끊임없이 자신을 비난 하고 인정하지 않는 자들에게 자신의 부르심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 사도로 이방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하며 여전히 바울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설득하고 설명하고 그렇게 말하며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바울 속에 그 들을 향한 마음 넘쳐나서 아니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이 넘쳐나서 도무지 참지 못하고 “너희가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 “나는 너희를 향하여 신뢰, 확신이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 도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위로는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기쁨은 무엇입니까? 주님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때론 우리가 잘 못하고 넘어질 때도 있습니다. 속상해 할 때도 있습니다. 낙심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주님 사랑하지 않으십니까?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여러분 속에 회복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복음전하라 이게 아닙니다. 그래서 지체 섬기고 교회 세우라 이게 아닙니다. 그냥 저는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했으면 좋겠습니다. 많이 잃어버렸다면 찾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회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사도바울이 그 수많은 고난 가운데 주님이 위로가 되고 주님이 기쁨이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우리를 향한 똑 같은 그 사랑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를 저주하던 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 사건으로 인해서 자신의 이전에 위대하게 생각했던 것들을 다 배설물로 여기고 주님으로 위로 받고 주님으로 기쁨이 넘치는 바울의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가슴을 뛰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찬양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축도
전능하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심과 독생자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하심이 보잘 것 없는 우리 부족한 인생 가운데 찾아오셔서 나보다 앞서 먼저 나를 사랑하시고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내버려 두시지 않으시고 우리를 붙잡아 주시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 죽으시고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신 그 기쁨이 우리에게 충만 하기를 소망합니다. 바라옵는 것은 주님을 더욱더 사랑하길 원합니다 주님을 더욱더 사랑하길 원합니다. 주님 더욱더 사랑해서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기를 소망하는 이음교회 성도님들과 함께한 모든 자 머리머리위에 지금으로부터 영원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
바울이 경험한 위로, 바울이 경험한 기쁨이 무엇인지 나눠 보실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