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주님의 은혜가 너무도 우리에게 족합니다.
본문 : 고린도후서 5:18~21
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19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20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제가 전도사 시절 포함해서 목회 경력이라고 할까요? 경험이라고 할까요? 13년 동안 사역을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또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수많은 일들을 해보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저를 보면 믿음이 가는지 가끔 이런 전화나 요청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목사님 사람 좀 시켜 주십시오.” 일전에 전화 한 통이 걸려 왔습니다. 예전에 부사역자로 사역했던 교회 집사님이 전화를 하셔서 하시는 말씀이, 얼마 전에 회사를 오픈했는데 아주 믿을 수 있는 사람, 성실한 사람 좀 소개 해주십시오.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목회를 하는 동안 사람을 소개해 달라는 이 요청에 누구를 소개를 해 준 적이 있나 이렇고 곰곰이 생각을 해봤는데 특별하게 누구를 소개를 해주거나 연결을 시켜준 적이 극히 드물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살아오면서 저와 같이 누구를 소개를 해줘야 하거나 소개를 해달라는 부탁을 많이들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사람을 소개 시켜주는 일이 굉장히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유는 겉으로 봐서는 그 사람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소개를 잘못 해줬다가는 욕먹기 일 수입니다.
그러다가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나는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일까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나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인가?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야 정목사님 어떤 사람이냐? 라고 물었을 때 사람들은 나를 다른 사람에게 소개 시켜줄 수 있는 그런 믿음이 가는 사람일까?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리고 눈을 감고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 돌이켜 보았는데 그다지 썩 좋은 평은 듣지 못할 수도 있겠다 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요? 사람들이 아무리 좋은 평가를 나를 향해서 쏟아 놓아도 자신의 그 마음속은 추악함과 온갖 이기적인 것들로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고 해도 곰곰이 생각해보면 참 좋은 평을 내리기가 어렵습니다. 혹 남들과 비교해서 뭐 이런 이런 것들은 내가 그래도 저 사람보다는 낫겠지 뭐 이런 평을 가끔 내 놓을 수 있겠는데 그 기준 마저도 저의 이기적인 생각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저는 그렇지만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그런데 혹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겠죠? “목사님 그래도 저는 그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살아왔고 어떤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해 준다고 해도 저는 폐를 끼칠 일이 절대 없을 것입니다. 저는 나름 괜찮은 사람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도 가끔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무리 괜찮은 사람일지라도 우리는 본래 하나님과 적대적인 관계였습니다. 인류에 아담과 하와로 선악을 알게하는 선악과를 따 먹는 그 사건으로부터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적대적인 관계였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과 사람, 인류와의 관계를 원수지간이었습니다. “목사님 저는 하나님과 원수지간이었던 적이 한 번 도 없습니다.”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하는 말 일 것입니다. 우리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었고 하나님과 원수관계였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죄에서, 사망에서 건지셨습니다.
갈라디아서 1:4
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그리고 우리에게 무엇을 주셨습니까? 부활의 기쁨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고린도후서 5:17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리고 우리는 그 예수 그리스도를 얻음으로 인해서 새롭게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8절에 “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이렇게 시작을 하게 됩니다.
인류는, 우리는 그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적대적 원수에 관계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으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적대적인, 원수의 관계에서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화목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카탈랏소 “바꾸다.”, “화해시키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무슨말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원수에 관계였는데 하나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우리와의 관계라 화목에 관계가 되었습니다. 바꾸어졌다는 것입니다. 원수에 관계가 화해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은 화목의 관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이 믿을 수 없는 우리에게 믿음이 도무지 가지 않는 변덕스러운 우리에게, 변덕스러울 뿐만아니라 아무리 눈 씻고 찾아봐도 소망할 것이 하나도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화목의 직분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쓰인 화목은 카탈랏소, 변현으로 카탈라게 “회복”의 의미가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그 구원의 기쁨, 복음으로써의 하나님, 그 생명을 회복하는 일에 직분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서 또 눈 여겨서 봐야 할 단어가 있는데 직분이라는 단어입니다. 여기서 직분, 직책이라고 읽는 이 단어 헬라어 어원은 “디아코니아”(봉사하다, 섬기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봉사하다. 섬기다.”란 단어는 신약성경에 34회나 사용되었는데 대부분 무슨 의미로 사용이 되었냐면 “식사에 시중을 드는 것”, 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누가복음 10:40
40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사도행전 6:1
1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고린도전서 16:15
15 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에베소서 4:12
12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제가 이 말씀을 가지고 묵상을 해보았습니다.
“식사에 시중을 드는 것” 그때 당시에 지금처럼 먹을 것이 넘쳐 났을까? 물론 모르는 일입니다. 하지만 지금 보다 먹고 마시는 것이 풍족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먹을 것이 없다는 가정하에 먹을 것을 나눈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담겨져 있을까요? 그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풍족할 때 나누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때 나누는 일은 그것은 쉽지 않습니다.
제가 예전에 한성기업에 촬영을 나갔다가 사진 촬영비를 대신해서 (크래미) 아시죠? 그것을 한 박스 얻어 왔습니다. 그 때 당시에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살림살이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비싼걸 오래오래 먹겠구나 했는데 한 3일 뒤인가? 아내에게 “여보 냉장고에 크래미 어딨어? 이렇게 물어 보았는데 옆집 언니들이랑 다 나눠줬다는 것입니다. 그 때 너무도 아까웠습니다. 아마도 넉넉하지 않은 중에 제 마음이 제 나눔이 인색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실 지금도 저는 여러분 앞에서 고백하지만 인색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어쩔 때 그게 스트레스가 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그 때 보다 더더더 없지만 할 수 만 있다면 나누려고 합니다. 잘 안됩니다. 하지만 마음이 임할 때면 그래도 주머니를 열어서 쪼개려고 합니다.
그리고 “식사에 시중을 드는 것” 또 다른 의미를 묵상해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식사를 대접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고마운 마음, 짠한 마음, 뭐라도 먹여서 보내고 싶은 마음, 부족하지만 이렇게라도 위로하고 싶은 마음 아니겠습니까? 그런데요 이게 공동체를 세우는 일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에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지체를 돌아보고 지체를 어떻게든 세우려는 마음 아닐까요? 위로 하고 싶은 마음 아닐까요? “야 그래도 우리 가끔은 맛있는 것 먹으면서 다시 힘내자?” 뭐 이런 마음이 아닐까요? 그 마음이 그 생각이 다시 주님 만나게 하고, 그 마음으로 서로 격려하고 다시 믿음을 회복하고, 주님 주신 구원을 해복하고, 원수 된 관계에서 화목하게 하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구원, 복음 회복하자 이 마음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교회 섬겨라 봉사해라 이렇게 말하면, 목사님 저는 그 직분 못 받겠습니다. 저는 아직 마음이 어려워서 누구를 돌아 볼 여유가 없습니다. 이렇게 속으로 말하는 사람 있을까요? 있을 수 있죠? 그런데요 제가 이 말씀의 핵심이 무엇인가 정말 섬겨라 섬겨라 섬겨라, 직분, 화목하게 해라, 이렇게만 생각했다면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이 말씀을 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까?
19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이미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고, 무슨 일을 맡기기엔 너무나도 연약하고 변덕스러운 자들입니다. 눈을 감고 생각해보면 지난날의 나의 연약함과 어리석음, 믿지 못함, 이기적인 것들로만 가득 차있는 자들입니다. 누구를 원망 하는 삶을 살았을 수 도 있고, 삶의 패배감에 이미 젖어서 아무것도 소망 할 것도 없는 그런 자들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요?
하나님은 나를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죄에서 우리를 건지셨습니다. 보라 새것이 되었구나, 보라 새것이 되었구나. 이제는 우리를 아무도 정죄 할 수 없습니다. 이제는 우리를 아무도 실패 했다. 말할 수 없습니다. 이제는 우리를 그 누구도 너는 잘 못 살았어 이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19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서 “부탁하셨느니라.” 의 원어적이 의미는 이렇습니다. 놓다. 두다. 지정하다.
하나님께서는 이 믿을 수 없는 우리를, 보잘 것 없는 우리를, 죄에서 건지심으로, 죽으심으로 화목하게 하는 자리에 우리를, 나를, 이 죄인을, 올려 두셨습니다. 놓아 주셨습니다. 지정하여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은혜를 입으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 구원의 은혜를 입으셨습니까?
주님 저는 아닙니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떠나십시오. 저는 세상의 패배감에, 저는 주님 주를 위해서 아무것도 해 드릴 것이 없습니다. 저는 그저 죄인입니다. 주님 저는요 일주일 내도록 원망만 하면 살고 있습니다. 주님 저는요 일주일 내도록 주님 생각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주님 저는요 말씀 되로 살지 않습니다. 저는 이생의 자랑과 연약함으로 인생을 허비하는 자입니다. 주님 저는요 일주일 내도로 신세 한탄만 했습니다. 주님 저를 떠나십시오.
이런 우리를 우리 주님께서 화목하게 하는 자리에 우리를 사랑하셔서 올려 두셨습니다. 놓아 주셨습니다. 지정하여 주셨습니다.
뿐만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하시기를 원하시는 지 알고 계십니까?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죽이신 이유가 이 보잘 것 없는 우리를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려고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지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그 자리에 두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그 무슨 이유로 그 무슨 행위로 하나님의 의가 되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의로 운자, 하나님의 의로운 자질을 가진 자, 하나님의 의로운 자질을 가진 상태 우리 인생이 도달 할 수 있을 까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소망하심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무엇이 관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습니까? 뿐만 아니라 세우시고 놓으시고 지정하시고 또한 그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심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셨습니까?
주님의 은혜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너무도 큽니다. 주님의 은혜가 너무도 우리에게 족합니다.
주님의 은혜가 너무도 우리에게 족합니다. 주님의 은혜가 너무도 우리에게 족합니다.
최근에 어떤 영상을 하나 접했습니다. 여러분도 보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아버지가 피자배달을 나간 아들이 한 괴한에게 무참이 살해 당한 그 괴한을 용서 하는 영상입니다. 그는 그 괴한을 안아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아들아. 나의 조카여 나의 아들과 아들의 어머니를 대신해서 나는 당신을 용서하겠네. 자네가 저지른 범죄를 자넷 탓으로 돌리지 않겠네, 난 자네에게 화나지 않았네, 당신이 내 아들을 난도질 한 무리 중 한 명이라는 이유로 말일세, 나는 사단에게 화가 나 있을 뿐이네, 나는 사단을 탓하겠네, 자네를 잘못 인도하고, 그런 끔찍한 범죄로 이끈 그 사단말일세, 용서는 가장 위대한 선물입니다. 라고 말을 마치며 자신의 아들을 무참이 살해한 그 괴한을 안아줍니다. 법을 집행해야 하는 판사는 이네 눈물을 터트립니다. 그리고 괴한은 아버지께 용서를 구하며 그의 품에 안겨서 한 참을 오열합니다. 그리고 이내 법적은 사람들의 울음 소리로 가득차게됩니다.
제가 이 영상을 다보고 한 참을 머물러 있다가 밑에 사람들이 쓴 댓글이 눈에 들어와서 쭉 내리면서 보는데 이런 댓글이 많은 사람들이 쓴 것을 보게되었습니다.
이해 할 수 없다. 말도 안 된다. 저렇게 용서하면 안 된다. 온갖 비난의 댓글들이 달려 있었습니다.
저는 그 댓글을 보면서 우리 하나님도 그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시고 그런 욕을 받으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을 고마워 할 줄 알았습니다. 사람들은 감사해 할 줄 알았습니다. 화목해 하는 직분을 주셨는데 내가 왜? 무슨 이유로?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들려왔습니다.
하나님은 그저 우리를 참으시고 사랑하셨는데,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 믿는 다는 사람들로 하여금 여전히 원망과 비난을 받으십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온 날들을 돌이켜 보면 수도없이 주님을 원망하고 이해 못한다고 왜 나를 이렇게 홀로 두십니까? 왜 나를 사랑한다면서 이렇게 고독하게 하십니까?
인생의 수많은 난제들을 만날 때 마다 저는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저를 여전히 사랑하시고 또 우리 공동체를 사랑하셔서 먼저 받은 자의 주님의 사랑을 나누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은혜가 너무도 우리에게 족합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6:1
1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기도하겠습니다.
찬양
오직 예수뿐이네 찬양하시면서 우리에게 이미 주신 은혜들을 헤아려보시겠습니다.
축도
전능하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심과 독생자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하심이 보잘 것 없는 우리 부족한 인생 가운데 찾아오셔서 나보다 앞서 먼저 나를 사랑하시고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내버려 두시지 않으시고 우리를 붙잡아 주시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 죽으시고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신 그 기쁨, 그러나 여전히 우리를 참으시고 사랑하시는 그 사랑, 사랑하실 뿐만아니라 우리를 화목해 하는 직분을 주시고 또 하나님의 의가 되게하려 하신 이 말씀을 믿는 믿음 가운데 살기로 작정하는 사랑하는 성도님들 머리머리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