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람이 함께 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 곤경에 빠졌을 때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선지자 엘리사의 제자들이 거주하는 곳이 좁아서
재목을 가져다가 거주할 처소를 늘리자고 합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흔쾌히 가라고 합니다.
그 때 제자들이 함께 가기를 청합니다.
그래서 엘리사가 제자들과 함께 나무를 베러 갔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나무를 베다가 그만 도끼를 놓쳐
물에 빠졌습니다. 그 사람은 외쳤습니다.
"아아, 내 주여 이는 빌려온 것이니이다."(5절)
나무를 베어 처소를 넓히려고 도끼를 빌려올 만
큼 열심히 일한 가난한 제자입니다. 그런 제자를
엘리사는 기꺼이 도와줍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어디 빠졌느냐?"(6절) 엘리사는 제자가 가리킨 지점에
나뭇가지를 베어 던집니다. 그러자 물에 빠졌던 도끼가
떠올랐습니다. 전래동화인 금도끼 은도끼가
생각나십니까? 그 순간 엘리사는 제자에게 물에
떠오른 도끼를 집으라고 합니다. 물에 빠진 도끼를
떠오르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의 일이지만
떠오른 도끼를 집어 올리는 것은 제자가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나사로를 살리실 때
예수님이 돌무덤을 막은 돌을 사람에게 치우게
하시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일은 주님이 친히
하신 것과 같지 않습니까? 갑자기 곤경에 빠질 때
하나님의 사람이 함께 하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연합해야 합니다. 그리고 특히
기도하는 사람과 말씀으로 권면하는 성숙한 성도와
함께 해야 합니다. 곤경에 빠질 때 그 성도들을 통해
하나님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서
당신이 할 일을 힘쓸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 공동체를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때로 교회를 위해 헌신하여 일하다가 곤경에 빠져도
하나님은 특별한 손길로 곤경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더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둘째, 위기에 처했을 때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람 왕이 이스라엘을 공격하기 위해 그의 신복들과
작전을 짰는데 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왕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왕은 삼가 아무 곳으로 지나가지 마소서 아람
사람이 그 곳으로 나오나이다."(9절)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자 아람 왕의 마음이 불안하여
그 신복들을 불러 말합니다. "우리 중에서 누가
이스라엘 왕과 내통하는 것을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11절)
그럴 만 하지 않습니까? 아람 왕이 그 신복들과 세운 작전을
다 들여다보듯이 하니 이런 의심을 할 만 합니다.
그 때 엘리사를 잘 아는 신하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주 왕이여 아니로소이다 오직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가 왕이 침실에서 하신 말씀을 이스라엘 왕에게
고하나이다."(12절) 이런 기막힌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다면 아람 왕이 어느 곳에서 하는 말이라도 다
드러난다는 뜻이 아닙니까? 우리가 이런 하나님을
의식한다면 사람들이 일든지 모르든지 말조심을
해야 합니다. 할 수 있다면 마음과 생각까지 성결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숨은 생각까지 다 아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시139:3-4은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도 알지 못하니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라고 합니다. 결국 대적이
공격하려는 것도 다 아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돕기 위해 엘리사를 통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함께 할 때 위험한 상황에서 보호하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마치 바울 때문에
거친 풍랑에서 살아난 276몀의 사람들을 생각할 수
있지 않습니까? 당신이 있기 때문에 가정이 안전하고
당신의 존재 때문에 이웃이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당신도 성숙한 성도와의
교제로 하나님의 도움을 경험하는 삶이 되길 축복합니다.